우리만의 무기는 가까이에 있습니다.
2021.09.20높게 솟아 있는 서울의 빌딩 숲, 길거리 빼곡하게 모여 있는 카페와 사람들, 몇 년 사이 일상이 되어 버린 배달 음식과 자동 결제 등 시대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빨라지고 있어요. 이렇듯 빠른 속도에 익숙해진 우리라면,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 만큼은 잠시 멈춰 이 질문에 답을 해보기로 해요.
‘나날이 발전해가는 시대 속, 과거를 만난 순간은 언제인가요?’
열심히 일한 뒤, 소중하게 마주한 주말을 이용해 낡고 오래된 한옥 마을을 찾아보면 괜스레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차가운 아스팔트보다 따듯함을 가득 담고 있는 나무 건물들, 언제나 새것처럼 보이는 테이블과 의자보다 사람 냄새 가득 나는 마룻바닥.
어쩌면 낡고 오래되었다고 생각한 것들에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따듯함이 남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그 따듯함을 오래 유지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기 위해 노력하는 월간 한옥의 안유선 디렉터님을 만나 보았습니다.
한국 문화를 알리는 일을 하자고 다짐했던 고등학생의 꿈
고등학교 때부터의 꿈이었어요. ‘나는 한국적인 걸 알리고 싶다.’ 노트에도 써놨던 기억이 있어요. 전통 공예, 한옥을 알리겠다는 엄청난 포부는 아니었지만, 막연하게 한국적인 걸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하게 했어요.
실제 해외여행을 가도 항상 들리는 곳은 골동품 가게였어요. 손때 묻은 것들이 많은 골동품 가게에 가는 게 너무 좋아요. 가게 속 물건들을 보면 사람 사는 모습이 느껴지는 거 같거든요. 그런 게 뭐가 또 있을까 생각해보니 바로 한옥이었어요. 우리나라에 오랫동안 있었던 것들이기에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지 더욱 궁금하고, 알아가다 보면 더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꾸준하게 한국적인 걸 알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할 수 있는 건 박물관, 미술관에서 일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조금 더 사람들과 가깝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너무 어렵거나 딱딱하지 않도록 전달하는 방법이 뭘까를 고민하던 중 ‘월간 한옥’이라는 매체를 통해 직접 디렉팅도 하고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서울 한옥 박람회’를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림이나 특정 상품, 공예품을 시각적으로 조명하여 다룰 수 있는 행사였어요. 그런데 저희 부스를 찾는 대부분의 분들이 2~30대였고, 사진도 많이 찍어가셨어요. 그때 확신을 갖게 됐죠.
‘사람들이 한옥이나 전통 공예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구나.
이 기회가 생기면 좀 더 많은 관심과 재미를 느낄 수 있겠구나!’
전시 후 느낀 걸 지속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는데, 역시나 책 또는 매거진이란 형태가 가장 적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집은 어떤 모습의, 누가 살고 있을까?
제 관심사는 오래된 것들, 그리고 공간을 채우는 것들이에요. 해외여행을 할 때도 멋진 건물의 외관도 좋지만, 항상 그 안의 공간들이 궁금했어요. 창 너머로 어떤 테이블이 있는지, 어떤 장식들이 사람들의 공간을 채우는지에 관심을 가졌죠. 그 개인적인 궁금증이 한옥까지 이어졌어요. 한옥을 보며 이전 우리의 생활이 어땠을지 상상해봐요. 옛날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한옥 안의 생활을 상상하는데, 이게 아주 매력적이에요. 결국 한국인의 의식주 문화가 모두 담겨 있는 공간이잖아요.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창덕궁 후원 공간이에요. 가려면 예약을 해야 하는데, 예약도 항상 금방 끝나버려요. 노력 끝에 예약에 성공해서 그 공간을 가면 머릿속에서 그림이 쫙 그려져요. ‘왕들이 여기서 정원 삼아 걷고 이야기를 나누었겠구나. 쉽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왕이 이 공간에서 산책하며 작은 여유를 느꼈겠구나’ 이런 상상을 저절로 하게 되는 거죠.
주변에 이미 있었던 오래된 것들, 한옥 등은 신경 쓰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어요. 너무 익숙해서 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죠. 저는 그런 것들을 다시 조명하여 그 안의 스토리와 디테일들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뿐인데 많은 분이 이러한 이야기를 접하면 항상 새롭게 느껴주세요. 이런 일이 너무나 보람되고,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의 본질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옥 큐레이터의 가장 애착이 가는 한옥
해외에서 친구들이 오면 항상 가는 곳이 있어요. 바로 ‘최순우 옛집’이에요. 직접 가 보시면 첨단화된 도시 속에 이런 한옥 공간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으실 거예요.
사실 최순우 옛집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던 건물이기에 사라질 뻔했어요. 하지만 시민들의 모금으로 건물을 매입하고 보존하게 되었죠. 그 후 다양한 전시 활동을 진행하고 있고, 현재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잘 보존되고 있어요.
크지 않은 최순우 옛집 한옥에 들어가 보면 빠르게 모든 공간을 다 둘러볼 수 있어요. 그중에서 안쪽 뒷마당이 있는데, 뒷마당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으면 너무 기분이 좋아요. 소소한 정원들도 보이고, 나무도 푸릇푸릇 보이죠.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 속 한국적인 공간에 앉아 여유를 느껴보시길 바랄게요.
계속해서 한국적인 걸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
한국적인 것은 우리만의 무기예요. 해외 생활을 많이 하여 서양 미술을 많이 접하고 좋아해도 한국 미술이 나에게 주는 차별성은 다르죠. 문화 예술을 기획하는 일을 하다 보니 한국적인 문화예술을 기획하는 일이 나에게 가장 잘 맞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구나 느껴요.
현재 사무실은 을지로지만, 이전 사무실은 익선동 옆이었어요. 출퇴근길에 마주하는 익선동 한옥의 모습이 매일 바뀌어 혼란스러웠던 적도 있었죠. 하지만 지금의 생각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관심 있는 다양한 모습으로 한옥이 바뀌는 게 오히려 한옥이나 전통을 유지할 수 있는 거 아닐까란 생각을 해요.
‘누군가는 변해가는 한옥을 보며 그게 전통이냐 아니냐를 논하겠지만,
전통을 보존하는 방식 혹은 전통을 재해석하는 방식을 흥미롭게 바라보면 좋을 거 같아요.
아직도 한옥을 만드는 분들이 계세요. 실제로 ‘한옥 목수에는 천재라는 것은 없다’라는 말이 있어요. 그저 꾸준하게 노력하는 게 한옥을 가장 잘 만드는 방법이라는 거죠. 한 명의 건축가가 조명을 받고 유명해지는 것도 의미 있지만, 한옥이라는 건 단순한 형태가 아닌 그 안의 다양한 요소들이 다채롭게 조명되는 것으로 나름의 의미를 느꼈으면 해요.
제가 하는 일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일’이에요. 전통은 숭고한 거야, 전통은 꼭 보존해야 하는 거야 라는 이야기보다 전통을 조금 더 자유롭게 활용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전통의 의미나 역사적인 이야기보다 과거를 미래와 연결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계속하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는 전통이 발전하는 모습이라 믿고, 월간 한옥을 꾸준히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