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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통음식, ASMR이 되다

2022.11.03
한복려의 ‘없었는데 있었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 한복려 선생님은
잊히는 전통 음식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가며 지켜내고 있습니다. 

“궁중음식을 시대에 맞게 바꾸고 전하는 게 제가 할 일이에요.”
–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 한복려

‘인간문화재’를 떠올리면 옛것에 대한 신념이 강하고 고지식할 것 같은데요, 한복려 선생님과 인터뷰하며 이런 선입견은 모두 깨졌습니다.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이자 궁중음식을 가르치는 선생님, 한복려의 깊고 진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전통과 미래를 함께 요리하는 진국인 한복려

조선왕조궁중음식 기능 보유자 한복려

안녕하세요, 음식하는 사람 한복려입니다. 정식 명칭은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입니다. 다른 문화재보다 명칭이 길더라고요. 그냥 요리 선생님으로 불러주세요.

 

Q. 특별한 호칭이 아니라 ‘선생님’으로 불러달라는 이유가 있을까요?

궁중음식 문화재단과 궁중음식연구원 등을 운영하면서 제자들에게 전통음식을 가르치고 있어요. 어머니는 늘 “사람이 태어나서 하는 것 중에 사람을 기르는 일이 최고”라는 얘길 했습니다. 그 말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어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학문적으로, 인간적으로 좋은 선생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선생이라 불러주는 것이 가장 편해요.

 

조선왕조 궁중음식, 무형문화재가 되다

궁중음식을 배우다

Q. 많은 제자를 두고 있다고 하셨는데,
선생님은 처음부터 요리에 관심이 있었나요?

처음엔 사학과에 가려고 했어요. 어머니는 제가 역사를 전공하길 원했거든요. 어머니는 궁중음식을 연구하며 자연스럽게 역사를 알게 됐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역사를 잘하지도 않았고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화훼과를 갔죠. 화훼과에선 꽃만 배운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과수와 농사도 배워요. 그땐 요리하게 될 줄 모르고 고른 학과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다 연관이 있구나’ 생각해요. 

 

궁중음식을 배우다

Q. 본격적으로 궁중음식을 시작한 계기가 어머니 덕분이라고 하던데.

어머니는 제2대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로 궁중음식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어요. 1942년에 가사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조선 전통음식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일본 유학을 다녀오셔서 우리나라 음식을 접할 기회가 적었대요. 그래서 조선의 마지막 궁녀인 한희순 상궁을 찾아갔고, 30년간 스승으로 모시며 궁중음식을 공부했습니다. 꾸준히 연구하며 궁중음식을 무형 문화재로 지정해 전통을 이어야겠다고 생각했대요. 

무형문화재 제도는 1964년 제정됐고, 한희순 상궁이 초대 궁중음식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가 된 건 1971년이었습니다. 노력의 결실이 빛을 발한 거죠.

무형문화재를 계승하기 위해 궁중음식연구원을 만들었어요. 또 국가에서 관리하는 문화재다 보니 전수자도 필요했습니다. 전수생이 어디 있겠어요? 당시 제가 막 결혼했을 때였는데 어머니는 제게 전수생을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궁중요리를 하게 됐죠.

 

어려움을 극복하고 어머니의 대를 잇다

궁중음식이 무형문화재가 되기까지

Q.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어려움이 있었다면서요? 

문화재로 지정되려면 전해 내려오는 역사를 모두 알아야 해요. 어머니는 많은 자료를 수집했고 직접 요리하며 배운 것들을 일일이 기록했어요. 

그리고 문화재 지정 여부를 심사하는 날, 연구를 통해 고증한 요리를 그대로 만들어 가져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심사위원 중 몇몇이 “여성이면 음식은 다 하는 것 아니야?”, “우리 엄마도 하고 할머니도 하는데 이게 무슨 문화재가 되냐?”라고 비아냥거렸대요.

 

무형문화재가 된 조선왕조 궁중음식

Q. 숱한 어려움에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네요?

심사위원 중 복식(옷과 음식) 전문가인 석주선 박사가 계셨어요. 석주선 박사의 공이 컸다고 합니다. 그도 여성이었기 때문에 요리의 어려움과 음식 문화의 필요성을 어필해줄 수 있었대요. 

저는 음식을 종합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예요. 궁중엔 다양한 의례가 있어요. 그 중심엔 늘 음식이 있죠. 연회를 열 때, 제사를 지낼 때 음식은 빠질 수 없습니다. 기쁠 때, 슬플 때 항상 함께하는 거예요. 음식은 단순하게 생각할 게 아닙니다. 

 

Q. 이후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음 대를 잇는 과정이 힘들었어요. 전수자는 세습되지 않아요. 대를 잇기 위해 경쟁자들이 많이 생겼죠. 거기서 제가 3대 전수자로 지정됐어요.

제가 대를 이을 수 있게 된 건 어머니의 깊은 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부 시샘 섞인 소문으로 여론몰이 대상이 됐죠. 심적으로 부담이 됐고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몸도 아팠어요.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내가 하는 일이 옳다는 생각을 계속했어요. 그리고 그 일을 꾸준히 했죠. 시간이 지나니까 모두 해결되더라고요. 누가 뭐라고 하든 묵묵히 나의 길을 가면 된다는 교훈을 얻었어요.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 한복려

Q. 많은 사람이 선생님의 노력을 알아주면 좋겠네요.

노력을 알아주시는 것도 좋겠지만, 궁중음식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학문으로써 공부해야 할 것이 많다는 점도요. 어머니는 궁중음식에 대한 정보를 알리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정보를 많이 찾아 기록해 뒀죠. 

저는 어머니가 찾은 정보를 토대로 열심히 공부해야 해요. 그리고 시대에 맞게 변형해 이어가야죠. 50년 넘게 요리했지만 배움엔 끝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도 공부하고 있는 거예요.

 

식재료에 전하는 미안함과 고마움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 한복려

Q. 선생님은 삶에서 많은 교훈을 얻는 것 같아요.
요리하며 얻은 깨달음도 있었나요?

어머니한테서 배운 게 있어요. 어머니는 요리할 때마다 식재료에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했죠. 살아있는 재료를 또 한 번 다치게 한다면서요.

이후, 저도 재료를 손질하면서 “고마워, 미안해”라고 얘기합니다. “대신 멋진 요리로 만들어 사람들의 배를 불릴게.”라는 말을 덧붙이면서요. 

궁중음식에 대한 진심을 담다

Q. 재료에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서 요리에 대한 진심이 느껴져요.
선생님만의 요리 철학이 있을까요?

음식은 드라마와 똑같다고 생각해요. 드라마를 만들 때 누가 볼 건지 생각하잖아요? 음식도 마찬가지예요. 누가 먹느냐를 생각하고 만들어야 합니다. 신선로라는 궁중음식이 있어요. 주로 기쁜 날에 소중한 사람들과 축하할 때 먹는 요리죠. 그 안에는 산해진미가 다 들어가는데 요리한 재료들이 모여 또 하나의 요리가 되는 음식이에요. 

그런데 이건 삶에도 적용할 수 있어요. 요즘 청년들은 직업도 빨리 가져야 하고 역량도 키워야 하니까 결과만 보고 달리는 것 같아요. 하지만 뭘 위해 사는지 생각하고 달려야 해요. 무작정 내달리면 제대로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귀로도 맛보는 전통음식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 한복려

Q. 선생님은 전수자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많은 사람에게 전통 음식을 쉽게 알리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어요. 나 자신을 기획자라고 생각합니다. 궁중음식에 대한 모든 것. 예를 들어 요리 도구를 비롯해 전통 레시피를 다양한 방식으로 알리려고 해요. 

그래서 한문으로 된 책을 번역해 요리책을 만들었어요. 궁중음식은 모두 한문으로 기록돼있어 일반인들이 읽을 수 없거든요. 저는 모두가 쉽게 읽고 만듦으로써 궁중음식이 어렵지 않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궁중음식 문화

Q. ASMR을 시도하신 것도 같은 이유네요.

그렇죠. 박물관에 가면 옛날 요리 도구를 볼 수 있어요. 심지어 종류별로 전시돼있죠. 과거의 박물관은 전시하는 것에서 그쳤어요. 하지만 요즘은 전통을 체험하는 공간이 많이 생기면서 변하고 있어요. 

전통음식도 옛날 방식으로 전시만 할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해요. 그래서 음식 만드는 과정을 ASMR 콘텐츠로 만들게 된 거예요. 옛날에 쓰이던 도구를 가지고 사계절 궁중 음식을 영상으로 담았어요. 절구로 양념, 쌀가루 빻는 소리를 생생하게 담았죠. 전통 요리 도구의 사용법도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거죠. 그래야 우리 전통음식이 조금 더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겠어요?

 

Q. 선생님의 열린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예로
드라마 대장금의 요리 자문한 일화가 있더라고요?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라는 유명한 대사가 있어요. 드라마에 나온 이 요리는 ‘죽순채’인데요. 궁중 요리법에 따르면 죽순채에는 홍시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작가의 발상이었죠. 전통 요리 방법은 아니었지만 직접 홍시 죽순채를 만들어봤어요. 생각보다 맛이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홍시 죽순채를 방송에 내보냈어요. 대신 전통 요리법을 방송국 게시판에 알려주었습니다. 선조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의 맛도 알아야 하니까요. 

 

시대와 함께하는 궁중음식 문화

Q. 어떻게 하면 전통을 이어 나갈 수 있을까요?

전통도 시대에 맞게 변해야죠. 전통음식과 ASMR 콘텐츠가 합쳐져 쉽게 다가갈 수 있었듯이, 다양한 것들과 콜라보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수준 높은 전통문화를 이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에 트렌드를 한 꼬집 넣어 궁중음식 문화를 전하는 한복려 선생님. 선생님과 이야기 나눌수록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전통 음식문화를 제대로 알려주고 시대에 발맞춰 전통을 잇겠다는 선생님의 가치를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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